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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더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켁켁거리며 흠뻑 들여마신 가루를 내뱉은 기억이 난다. 무슨 정신에서인지 후추가루를 코로 마셨다고 한다. 전날 과음한 탓이다. 수능이 끝난 고 3은 고삐 풀린 망아지라고 하지 않는가. 나 또한 그런 류였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까지 한 지금, 날 구속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몸은 미성년자지만, 정신은 어른. 과도기에 서 있는 나였다.




 ...라고 거창하게 설명은 했지만서도 여러 모로 마음이 복잡하다. 졸업하면 떨어질 친구들이라던가, 허허벌판에 혼자 남겨질 생각이라던가. 언제나 외로움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새로움 또한 별로 좋아하는 상황이 아니다. 종종 - 어쩌면 꽤 많이 -  외로움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스스한 정신을 가다듬고, 교복을 챙겨 입었다. 무단 지각은 해도 무단 결석은 하지 말자는 것이 나의 신조. 고데기는 포기하고 집을 나섰다. 그 때, 우연찮게 마주친 옆 집 여자가 나왔다. 평소에는 잘 마주칠 수 없었는데, 그 이유가 이 시간대에 나와서 그런건가 하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보다 한 층 밝은 톤의 그 여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 바보같은 웃음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나보다. 여자가 떠난 다음에도 나는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건 바보같은 짓이다. 이름도 모르는 - 딱 봐도 성인인 - 여자를 멍하니 보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거기에 잠시나마 흔들린 것도 바보같은 짓이리라. 추스리며 칼바람을 뚫었다. 쌩, 하고 지나가는 그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모든게 편해졌다.




 수업시간에도 멍한 상태로 창 밖만 바라봤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낙엽마저 떨어지려고 한다. 낙엽이 다 떨어질 때 즈음 졸업도 하고 눈꽃도 피워지겠지, 라며 읽지도 않던 시집을 펼쳐본다. 




'나한테 당신은 벚꽃이야...'




 엑, 이게 뭔가. 서정적인건 맞지만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차라리 지금이 봄이었다면 좀 더 좋은 시구로 인식했겠지만, 칼바람이 불고 낙엽조차 없으며 눈꽃이 쌓이기를 기다리는 겨울에 벚꽃에 대한 시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장으로 넘겼다.




'사랑의 물리학?'




 이름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물리라면 오직 수능을 잘 보기 위한 과목이었을 뿐이다. 애써 다른 장으로 넘겼다.




'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이현승의 '별에 기대어 말하다' 라는 시. 서정적인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을 좋아하는 - 이유는 햇빛이 없어서 라고 한다 - 나에게 이만한 시구가 없었다. 물론 거의 제목에만 밤하늘이 들어가 있었으므로 딱히 별에 대한 그런 것은 없지만. 작년 이맘때 즈음 누군가가 낙엽을 주워 만들었다며 선물해 준 갈피를 그 안에 끼워넣고 시집을 덮었다. 아무래도 오늘 분위기 잡기는 틀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2학년들의 기말고사도 끝나서 자습실은 텅 비어있었다. 11시까지 이용이 가능하므로 시간 때우기에는 그만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가고싶은 과에서 공부하는 내용에 대한 책 몇 권과 읽다 만 시집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성적 순으로 자리를 잡게 해주는데, 한 번도 앉아보지 못했던 1등의 전유물인 '의자가 푹신하며 창문이 있어서 광합성에 용이한' 자리를 차지했다. 풀썩, 하고 앉으니 의자가 맥아리 없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부러트린게 아닐까 하며 봤지만 원래 그런 것이어서 안심했다. 그러고는 전공에 관한 쉬운 입문 서적인 '별에 대하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별은 생애 주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사람과는 조금 다르게 언제나 빛나는 과정이다. 갓 태어난 별은 뜨겁고 푸르며 청년이 된 별은 순백의 색을 자랑하고 늙은 별은 웅장한 붉음을 자랑한다. 그 후에는 중성자별이 되거나, 모든것을 흡수하는 블랙홀이 되고는 한다. 나는 때때로 이 블랙홀과 동화되는 꿈을 그리기도 한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생각이 맞아 떨어진다.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바에야 가장 아름다운 것에 동화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저자가 누군지 찾아본 책은 거의 없지만 이번만큼은 저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휴대전화를 켜고 포털 사이트에 저자의 이름을 넣었다. 강슬기. 뭐야, 죄다 다슬기밖에 나오지 않는다. 책 이름까지 함께 검색하자 꽤 젊은 여자의 사진이 나왔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기억을 되짚었다. 그 때, 뇌리에 스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 그 옆 집!"




 옆 집에 사는 그 사람이 이 책의 저자였다는 것. 재빨리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 사람, 생각이 맞는 사람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다. 생각이 맞는 사람, 이 사람과 대화를 한다면 인사 한 마디도 재미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베시시 웃음이 나온다. 뜀박질이 이렇게나 가벼울 줄이야!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마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기어코 퇴근 시간도 전에 그 사람의 집 앞에 도착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 같은 라인, 심지어 바로 옆 집. 이렇게나 가까이 이런 사람이 있었으면서 눈치 채지 못한 나는 무디다. 철제 문을 조금 세게 두드린다. 쾅, 쾅. 소리가 아파트 전체에 울리면 좋겠다. 하지만 안에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못 들었나 싶어 더 두드린다. 하지만 정말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아,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아서 집 주인이 오기를 기다린다. 7시밖에 안 됐는데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8시, 9시.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칼바람이 매섭다. 들어가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모처럼 시간 써 가면서 기다리고 있다. 잠을 자지 않더라도 이 사람만큼은 기다릴 것이다.




"어, 학생은 아까 그..."




 아까 들었던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에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 - 이런 부류의 사람을 본 듯한 것에서 온 - 이 섞여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보았다. 잔뜩 맑은 눈망울이다. 쌍꺼풀은 없는데 눈이 크다. 신기한 사람이다.




"기다렸어요."




 당당히 기다렸다고 대답했다. 그야 기다린게 맞으니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그 사람은 다시 물었다.




"바로 옆 집인데도?"




 바로 옆 집인데도! 그걸 정성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나는 바로 옆 집에 사는데도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추운 곳에서 떨며 기다렸다. 이것이 이 사람에게 전달되었으면 한다. 이 사람은 으음, 이라며 턱을 괴더니 나를 집 안으로 불렀다. 드디어 이야기를 해 주려나 싶었다. 별에 대하여, 그 아름다움에 대하여. 하지만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왜 기다렸어요?"


"네?"


"왜 기다렸냐고 묻고 있어요."


"그야, 강슬기 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인, 인터넷에 다 뜨던데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당연히 내 생각을 읽을 줄 알았는데 이건 무슨? 내 생각을 읽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말인가 싶다. 하지만 이 사람이 그럴리가 없다. 나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쓴 책과, 그 책의 사상과, 그것에 매료된 나. 그렇게 설명하고 나니 그제서야 이해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웃고는 나를 보았다.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할까요?"




 그 사람이 가져온 차는 - 당연하지만 - 따뜻했다. 녹차가 아닌 말차를 가져왔다. 우연의 일치일까? 설탕과자는 가져오지 않았다. 차를 즐기는 습관은 또 소름돋게 비슷했다.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사실, 떠졌다가 더 옳은 표현이겠지만. 그리고는 차를 마신다. 그 모습을 사람은 그저 웃으면서만 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신 거예요?"


"아니 그냥. 나 기다렸다는게 너무 대단해서요."


"세 시간 정도인걸요."


"나 되게 불규칙한 사람이라, 오늘 안 들어올 수도 있었거든요. 안 들어왔으면 나 다음날에 9시 뉴스 메인 갈 뻔 했다. '19세 고교생, 동사하게 만든 원인...'"


"그럴 일은 없잖아요."


"귀여워, 진짜."




 그 사람은 마치 나를 동생 다루듯 쿡쿡대며 웃었다. 어린 애 취급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고대하던 사람과의 대화인 만큼 조금 더 집중해보자고 했다. 듣고 듣고 듣고... 그 사람의 입에서는 의미없는 이야기만 나오고 있었다.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지? 나는 더는 못 참겠다는 마음을 담아 까칠한 말투로 그 사람에게 쏘아붙였다.




"대체 책과 별에 대한 얘기는 언제쯤 해주실 건가요?"


"그 얘기 안 할 거예요."


"그럼 제가 기다린 의미가 없잖아요."


"누가 기다리래요? 멋대로 기다려놓고선 그래."




 조금 어이가 없긴 해도 맞는 말이라 반박 할 수 없었다. 사실 멋대로 기다린건 나다. 하지만 기다린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밖에서 칼바람 맞고 덜덜 떨면서 기다린 것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했던 강슬기와의 대화는 애초부터 없던 것이라는 말인가. 인정할 수 없다. 어떻게든, 별에 대한 사상을 꺼내게 할 것이다. 어떻게든! 나는 강슬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강슬기는 그저, 뱀처럼 웃고있을 뿐이다. 정신 차리자. 말차를 마셔 쓴 기운으로 제 정신을 돌아오게 했다.




"그럼 무슨 얘기 하실거예요?"


"너 사는 얘기."


"별 얘기 해 주셔야죠,"


"퇴근해서도 일 얘기 하는게 얼마나 싫은건지 체감할 수 있는 나이 아닌가?"


"그래도, 조금..."


"귀여워도 안 돼요. 난 학생 얘기 들어야지. 이름이 뭐예요?"


"별 얘기 안 해주시면 대답 안 할거예요."


"그럼 나가요."


"...김예림이요."




 결국 아쉬운 쪽이 지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은 김예림, 김예림이라고 되뇌이며 내 이름을 외우려고 애쓰는 것 같다. 각인이 된 듯 하니 마치 머리맡에서 백열전구가 반짝여야 할 리액션을 취하고는 다시 나를 봤다. 고등학생인 건 아니까 나이를 알려달란다.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수능 끝난 고삼이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웃으면서,




"풀어진 거 볼때부터 알아차려야 했는데!"




 라면서 추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계속 보다보니, 그 모습이 마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형견 같아서 괜히 웃음이 나온다. 내 표정을 본 사람이 내가 긴장이 풀렸다고 알아차려 버린건지 차를 재빨리 치우고는 나에 대해 좀 더 물어보기 시작했다.




"집은 진짜 여기 맞아요?


동생은 있어요?


언니는 없나요?


나 예쁘죠?"




 등 쓸모 없는 것 뿐이었지만. 어째 별에 대해서는 하나도 말해주지 않으니 섭섭한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간다. 표정이 차츰 어두워지자 사람이 나를 보고는 토닥이며 말했다.




"아아, 그런 표정 진짜 짓지 말라니까."




 사실 그런 말은 한 적은 없었지만 본인은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굳이 말해봤자 듣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 일 할때 찾아오면 진짜 대답 해줄테니까, 다음엔 일 할 때 찾아와요."




 일 할 때 찾아오라는 말이 어째 거슬린다. 나는 강슬기의 특별한 제자이자 사상의 동반자가 되고싶을 뿐이지 누구나 될 수 있는 학생은 되고 싶지 않다. 싫어요, 라고 대답했다. 강슬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인지 물었다.




"특별해지고 싶은걸요."




 어쩐지 그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리라곤 생각하지 못 했는데. 강슬기의 두 뺨이 붉게 물드는 건 한 순간의 일이었다. 강슬기가 말했다.




"그... 조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오늘은 이만 가 줄래요."




 강슬기가 왜 저러는지, 사실 잘 몰랐다고 하는게 옳겠지.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바로 들어갔다. 강슬기의 붉은 뺨이 나를 향한 건지는 모르는 채로 들어갔다. 그 때의 난, 조금 멍청했다.




*   *   *




 어쩐지 그 날 이후로 강슬기는 좀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 같다. 집에도 6시면 항상 들어오고, 퇴근하면 나에게 늘 언제오냐며 재촉 아닌 재촉을 하는지라 나 또한 6시 이전에 먼저 집에 들어가있게 되었다. 강슬기의 집에서 거의 생활하다시피 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같이 잠을 자기도 했다. 갑자기 육체적으로 - 물론 정신적으로도 - 확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서 이상하게 강슬기를 쳐다보면 오히려 그 쪽이 더 의문이라는 듯 나를 바라본다. 이게 무슨 일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가까워진 기분, 분명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레 웃는 일이 많아졌다.




언니, 나 왔어요. 오늘 내가 저녁 차려줄까?


예림아ㅠㅜ 언니 오늘 야근 잡혀있어ㅠㅠㅠ


아,,, 그럼 도시락 싸서 언니 회사로 갈게요.


예림이 왕 사랑♥♥♥ ...이긴 한데 언니 오늘 회식이야ㅠ퓨ㅠㅠ


술 마시고 들어오면 언니 집 문 안 열어줌 ㅅㄱ


김예림? 저기요 예림씨?? 예림ㅇㅏ...?




 회식이라니, 당연히 음주를 하고 개 같은 상사라는 것의 비위도 맞추고 해야 할 텐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종합해보면 슬기는 '통보' 하는 성격이므로 이미 술을 마시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슬기에게 '곧 갈게요' 라고 문자를 보내고 슬기가 다니는 직장 근처의 술집을 다 뒤져보기로 했다.




 뛰고, 찾고, 뛰었다. 마지막 술집까지 돌아본 나는 그들이 이미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거리에서 슬기의 용모를 물어 그가 어디있는지 수소문 한 끝에 무슨 노래방 방면으로 가고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쪽 길로 가서 미리 사람들을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만취한 상태로 동료에게 붙들려 있는 슬기를 볼 수 있었다. 저 인간이 문자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러고 있다는 것은 나를 조금 화나게 만든다. 슬기의 동료에게 다가갔다. 슬기는 모든 것과 대화하고 있다. 동료나, 전봇대나, 전선의 참새라던가.




"언니! 거기서 뭐 하는거예요, 진짜!"


"...누구?"




 에. 이젠 나마저 못 알아보는건가. 조금 상처받아버렸다. 풀이 조금 죽은 나를 보고 처음 그 때처럼 쿡쿡 웃더니 내 코를 저의 검지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거, 짓말. 우리 예림일 내가 어떻게 못 알아봐~"




 안 그래도 낯 가림 없고 유한 성격이 더 그렇게 변했다. 동료는 마치 어둠 속의 구원자를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하는 수 없는 체 하며 슬기를 집까지 끌고 간다. 가면서도 슬기는 뭐 그리 혼잣말을 해 대는지, 이러쿵 저러쿵.




"으응~ 예림아~ 저기 참새 너무 아아프지 않을까아?"


"참새 다리 사이의 간격이 짧아서 괜찮아요."


"혹...시! 참새 다리는 고무가 아닐까!"


"아니예요."


"그럼... 고무 장갑은... 참새 다리 잘라서 만드는거야...?"


"아니라고..."




 집에 도착할 때에 나는 매우 지쳐있었다. 이 사람에게 이만큼이나 고약한 술버릇이 있을줄은 상상조차 못 했건만. 애써 그녀를 침대 위에 앉혀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저 집에 갈게요"




 그러자 나의 손목을 움켜잡는 손길이 느껴진다. 깜짝 놀라 그 쪽을 보니 - 당연한 이야기지만 - 슬기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헤실거리면서 가지 말라며 웃고, 저 쪽으로 가서 같이 자자며 다시 웃었다. 얼굴은 술 기운 탓인지 빨갛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안 돼요. 저 피곤해요. 누구 때문에 오늘 예정에 없던 여정을 떠나서요."


"싫어어-"


"갈거예요. 안녕히 주무세요. 굿 나잇."


"가면 너 다시는 집에 안 들여보낼거야."




 아, 또다. 첫 만남때도 어쩐지 이랬던 것 같다. 데자뷰인가. 역시나 아쉬운 쪽이 진다더니. 별 수 없이 순순히 슬기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점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둘의 체취 - 나의 비뉴향과 슬기의 복사꽃 내음과 술 냄새. - 가 섞여서 알싸하다. 취하지 않았음에도 취기가 돈다. 침대 위에 풀썩 앉아서 괜히 손을 만지작 거렸다. 그 때, 슬기가 침묵을 깼다.




"우리 예림이느은-"


'나는?'


"언니가 어떤 마음고생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내가?'


"예림이 저번에! 언니한테 뭐라고 했어."


'내가 뭐라고 했나?'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끝까지 안 하는 것이고 하나는... 여하튼 나는 끝까지 말을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어' 를 끝으로 슬기가 기절잠을 자버렸기 때문이다. 허, 어이없어. 한참동안 슬기를 그렇게 쳐다본 나는 바깥에서 입다 온 그 옷을 입은 채로 자는 꼴을 보기 싫어 슬기의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내일 아침. 그 말을 빨리 이어듣기 위해 잠옷으로 갈아입고 슬기의 집에서 잠을 청했다. 옆에 누워서는 생각했다. 분명히 샤워도 안 한 주제에 체향은 달큰하다.




*   *   *





 나는 슬기의 작은 비명과 함께 기상했다. 자신의 옷이 갈아입혀진 것을 보고 놀란건지, 내가 옆에 있어서 놀란건지.




"왜 그렇게 놀라요?"


"나... 귀소본능 있나봐!"


"네?"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 그 개가 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건가? 모든 뒷처리를 해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정녕 본인이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니까 언니 말은-"


"나 봐! 옷도 갈아입고 침대 위에서 멀쩡하게 자기까지 했어! 대박! 이제 맘 놓고 달려도 되겠-"


"내가 한거거든요! 이 썩을 언니가!"




 슬기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 점에서 좀 더 짜증이 난다. 어떻게 은혜를 잊을 수가 있는지. 나는 슬기에게 자초지종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금 따지는 말투지만 상관 없었다.




"내가, 언니 문자 받고 바로 회사 앞까지 갔어. 가서 술집 뒤지고 사람들한테 언니 행방 묻고... 그러면서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는 알아요? 나쁜 새끼가 무슨 짓 하면 어쩌나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냐고."


"예림아,"


"언니 봤을 때 얼마나 안심됐는지. 그렇게 화 내는 것도 잊고 집에 와서 언니 옷도 다 갈아입혔어요. 언니가 가지 말래서 같이 자주기까지 했다고요, 아!"




 나는 그제서야 내가 왜 여기서 잤는지 생각해냈다. 어제 듣지 못했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서였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슬기를 바라본다. 역시 강아지같다.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고, 슬기에게 어제 말을 이어서 물어본다. 슬기의 표정은, 어쩐지 가관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언니, 마음고생을 왜 하고 있는거예요. 나 때문이라며. 말을 해봐요.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




 슬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은 숙취 때문인건지 취기가 가시지 않은건지 귀까지 빨개져있다. 나는 그런 슬기의 볼을 보며 어쩌면 꼬집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대답을 듣는게 우선이다. 슬기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심호흡을 하더니 말문을 텄다.




"말 해도 안 멀어지겠다고 약속 해."


"할게요. 약속."


"멀어지면, 멀어지려고 하면, 멀어지게 만들면... 넌 진짜 평생 저주받을거야."


"괜찮아요. 무슨 말이든 해 봐요."




 다시 슬기의 입이 열리기까지는 20초가량이 걸렸다. 그리고 그 입에서는 너무나도 작지만 나의 귀에는 선명하게 꽂히는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법같은, 말이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처음 만났을 때 '특별해지고 싶은걸요' 라고 네가 말할 때 부터 너를 좋아했어. 너는 그런 말 한 기억 없지?"


"언니."


"나는 너보다 나이도 많고, 같은 여자니까 어쩌면 끔찍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

 

"하, 지금 생각 해보니 아까 그 저주는 무효로 하는게 좋겠다. 나라도 싫어, 나 같은 사람."


"...언니 저는요,"


"거절해줘, 그리고 전부 잊어줘. 예전처럼은 바라지도 않을게, 제발 나를 모른 척 하지만 말아줘... 응?"


"좀 끝까지 들어요. 좀."




 아까보다 전체적으로 더욱 빨개진 슬기의 볼은 마치 만개해버린 장미와도 같았다. 그 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금세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입 안에서 대답할 건덕지들은 넘쳐나는데 말을 선택할 수 없다. 난 슬기가 좋다. 난 슬기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 버렸다. 지금 알아차린 것 뿐이다. 그리고, 확실하고 멋있는 대답으로 슬기를 웃게 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지 않기만을 꽤 오랫동안 한 걸까, 슬기는 거의 포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웃음, 저 놓은 웃음을 행복하게 바꿀 한 마디를 내가 찾고있다는 걸 알면 분명히 날 안아줄텐데.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람, 특별한 사람, 특별한... 특별한 사람. 이거다. 멋지고, 확실한 대답의 말. 처음 이야기 했을 때도, 고백을 들었을 때도. 항상 특별할 때 들었던 '특별한 사람' 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칼바람이 몸을 스치듯 강하게 충격을 남긴다. 입을 열자 슬기의 표정은 굳는다. 빨리, 빨리 말해야 해. 슬기를 웃게 해야 해.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언니."




 슬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는 잠시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짜릿하다. 정신을 놓을 정도로 행복하다. 그리고 그건 슬기도 마찬가지 인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슬기의 눈에 비친 나는 조금 더 붉은 얼굴로 슬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엇갈리지 않았떤 마법같은 이야기가 여기서 끝맺어진다. 사랑아, 사랑아. 부디 끝까지 붉기를 바란다. 사랑아, 부디 끝까지 붉기를. 슬기를 그렇게 안았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조금 더 사랑스러운 온기가 나를 감싸온다.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사랑아, 사랑아, 부디 끝까지 이어지어라.

나의 특별한 사람아, 끝까지 붉어라.




 두 사람의 모든 것은, 특별한 붉음이었다. 그렇게 외쳤다.




*   *   *




공백 포함 10628자, 공백 제외 7697자.

처음 쓴 레드벨벳인 만큼, 저에겐 특별하네요 .

오타 지적과 맞춤법 지적은 늘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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