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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발짝 한 발짝을 빠르게 디디며 생각했다. 비가 오고 난 후의 하늘에서는 우산이 쓸모 없다고. 비가 오고 생긴 기찻길과의 교차로 앞 웅덩이에는 하늘색 하늘이 비추었다. 장우산을 일부러 웅덩이에 넣어 끌며 자판기 앞으로 갔다. 손에 보이는건 백 원짜리 동전 하나-, 두 개구나. 이 정도면 충분히 비싼 보리차 하나 정도는 사 마실 수 있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보리차 페트가 나왔다. 차가운 기운이 물신, 피부에 닿았다. 여름도 아닌 주제에 비가 오고도 더운 날씨에서는 꽤나 편리했다. 뚜껑을 열고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 생각난건, 유난히 이 자판기의 보리차를 좋아하는, 어떤 여자아이였다.


청춘의 고백_1인칭 주인공 시점

W. 간첩


 갓 입학하여 벚꽃을 기다리는 3월 중순을 달리고 있었다. 날씨는 제법 따스해져서 동복을 벗고 춘추복을 입어도 되는 온도까지 올라갔다. 중 3의 봄은 짧다고 누가 그랬었나, 그건 지구온난화 때문이라 믿는다. 별로 짧지 않은 봄이었다. 밖에는 곧 만개할 목련의 작은 망울이 껍데기를 찢어 새 생명을 속삭이고 있었으나 곧 바닥에 더럽게 떨어질 꽃잎을 생각하니 확, 기분이 안 좋아졌다.

 햇살과 함께 날아온 반 배정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저 친한 친구 둘과 과거에 좀 어색했던 녀석들, 정도로 구성되어있었다. 뭐, 어색이 어찌됐든 친한애들만 있으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담임이었지 클래스메이트가 아니란 말이다.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치고 인사를 꾹꾹 집어넣은 후에 다시 창 밖을 보았다. 봄바람에 살랑대는 상록수의 바늘과도 같은 잎이 살랑였다.

 그러고보니, 옆 반엔 누가 있더라. 옆 반으로 관심을 옮겨 옆반의 문을 살짝 열었다. 2학년때에 친했던 애와, 친해진지 채 반년도 안 된 여자아이가 있었다. 굳이 후자에겐 인사를 건넬 필요가 없겠지, 라며 친했던 애에게만 인사를 건넸다. 사실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걸어준건 친해진지 채 반년도 안 된 여자아이였다.

 언뜻 보기에도 그 애의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손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만질 수 있는 사이로 진보하면서부터, 그 애의 손바닥을 자주 만졌다. 고양이 손바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타인의 손도 누르면 이 애처럼 좋은 감촉을 느낄 수 있을까, 내 손바닥은 남성스러운거였나, 여러가지 느낌이 교차했다. 더해서, 괜히 제 검지와 엄지를 살짝 비비는 그 애의 제스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그 애를 집으로 불렀다. 방학이었다. 에어컨도 없는 집안으로 초대하는건 좀 그렇지만, 그 애는 흔쾌히 와 주었다. 친구로부터 빌린 영화를 틀어주며 함께 쓸모없는 얘기를 나눴다. 증간중간에 15세 관람가가 맞나, 의문이 들만한 베드씬이 두 번 나오긴 했지만 머쓱하게 웃으며 넘겼다. 그 때, 전율이 들었다. 
너랑, 하면, 저런 느낌일까?

동공에 지진이 일어남과 동시에 갈증이 났다. 미쳤어, 친구 상대로 무슨 불순한 생각을 하는건지. 잠깐 화장실좀, 이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책감과 여러가지 느낌이 또 한번 교차해서 식은땀이 다 났다. 찬 물로 세수를 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 애는 이런 야한 영화는 처음인지, 확실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귀까지 붉어져서는.

 그, 그러지 말고 다른거 볼까. 그 애가 몰입한 듯 대답하지 않았다. 뭐, 몰입했으면 별 수 없지. 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끝에 보이는 것은 못 알아먹을 것 같은 일어 사이로 밝게 빛나는 자막이었다.

당신은 평생 내 마음을 모르는 채로 있어주세요

 어찌나 아름다웁고도 절망스러운 사랑의 말인가. 사랑함을 들키면 안 되기에 마음을 알게 하는 것 조차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딱하다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동병상련이라는 것은 공감력을 키웠다. 그 후로 랩 하듯이 빠른 일본어가 귀를 스쳤다. 자막만 보면 역시 일본 감성은 잘 모르겠다. 그 애는 뭐가 그리 좋은걸까.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있는 것이 아닐까, 쓸데 없는 생각이었다. 고양이의 유리체같은 그 애의 각막에 하이얀 빛이 비추는 것 처럼 보였다. 눈이 살짝 젖은 것 같았다. 나 또한 그 애와 같이 영화에 몰두했다.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영화가 끝나자 그 애는 잠들어있었다. 잠들었다. 좀 깊게 잠들었다. 그래, 저 영화 후반부엔 좀 재미없는 감이 있었지. 좀이 아니었나보다. 습, 하고 주변의 산소를 들이마셨다. 봄임에도 불구하고 덥고 습했다. 그 애를 깨우려 했으나 굳이 깊게 잠든 애를 깨울 필요까지야. 홀로 일어나 조심스레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고 아직 물기가 남은 입술을 왼손등으로 스윽 닦으려 하는 찰나에 그 애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애의 입술은 언제나 부드러워보였다. 키스하면 어떤 느낌일까? 살짝 닿기만 하면 괜찮지 않을까? 싫어하지 않을까? 당연히 깨겠지? 짜증나는 욕구를 뒤로 하고 그 애의 옆에 앉았다.

 멍청한 녀석이라 그런지 자는 표정도 멍청했다. 고개는 하늘을 향해서, 입은 벌린채로. 버스에서 자듯이 멍청하게 잤다. 앞으로, 3분. 그 애가 저 자세로 자면 10분 주기로 자고 깨기를 반복한다는 가정 하에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이 사이에는 아주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기 때문에 절대로 건들지 말것. 뭐, 아무튼.

 그대로 사색했다. 그 애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사실 이전까진 정말 순수하게 친구로밖에 보이지 않던 애가 어떤 것을 계기로 이렇게까지 깊숙히 침투한걸까. 너 주제에, 왜 그렇게까지 사람을 괴롭히는걸까. 어찌되든 좋았다. 아직 1분이라는 시간이 남았고 시간은 내 편이었다. 그대로 오른손 검지를 그 애의 입술에다 대었다. 각질 하나 없는 부들부들한 입술이었다. 그 애의 틴트가 묻어 손 끝이 붉어졌다. 내심 좋았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나보다. 멍청하게 잠든 그 얼굴 탓인가, 아니면 닿은 탓인가.

 그 애가 살짝 뒤척이자 딱히 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딱히 알아챈 것 같진 않아, 그리고, 느낌이 났다 해도 벌레가 앉았다고 하면 되겠지, 뭐. 숨겨야 하는건 아니겠지. 왜냐하면 건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니까.

_비록 당당히 말할 순 없음에도 생각은 매일 하겠지.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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