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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마마무 단편

[용휜] 아벨리아

마추PIKCHU 2017. 12. 10. 00:35

  딱히 말하고 싶은 것은 없던 적이 없다. 어렸을 적부터 말 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 하는 것을 즐겼다. 뭐가 좋아요, 뭐가 싫어요, 뭐는 어쩌든 좋아요... 그렇게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나를 똑똑한 아이, 혹자는 맹랑한 아이 - 맹랑한 아이? 애초부터 나를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보고 한 말이 아닌가. 그래서 이 말은 좀 싫어한다 - 라던가, 야무진 아이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들으면 역시 기분이 좋다. 지금도 그런데 어릴 때는 더 그랬겠지.




 하지만 요새는 말 할 수 있는 범위가 어쩐지 예전보다 줄어든 기분이다. 과거에는 어휘가 부족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으면, 현재는 상황 파악을 하느라 말을 할 수 없다. 나이를 먹어가면 상황파악은 상황파악대로, 어휘는 어휘대로 늘어야 하는데 어쩐지 반비례하는 모양이다. 으음, 이게 아닌데. 사실 어찌 되든 좋다. 전하지 못할 것이라면 확실히 전하지 못하는 것이 나은 모양이다.




 전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그런 것을 전해봤자 좋을 것은 없다. 사람에게 피해만 주는 독충이 되는 지름길이다. 가령,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보고싶어요, 나와 입 맞출래요... 어찌 되든 사람 대 사람으로 하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 편이 좋은 것들 뿐이다. 나 또한 그것에 순응한다. 내가 그 말을 전해봤자,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별로 좋은 표정을 짓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용선, 김용선. 당신이 웃고 있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웃음을 준다. 내가 말 한 마디를 잘 못해서 그 웃음이 사라진다면, 유쾌하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은가. 그다지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면 좋겠지만.




 입 안에 사탕을 넣고 이리저리 굴린다. 단 것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조금 큰 사탕이라 그런지 녹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이참에 나도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글로 써볼까 한다. 저번에 혜진의 생일에 쓰고 남은 편지지를 가져왔다. A4보다 조금 더 작은 사이즈. 한 면은 금방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연필을 들고 첫 마디를 쓴다. 용, 선, 언니에게. 이 다음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안녕이라며 인사를 썼다 지우고 본론부터 썼다 지운다. 역시 첫 마디가 어렵다. 별 수 없이 아주 작은 글씨로 '좋아해, 용선언니' 라고 쓰고는 연필을 내려놓는다. 날이 좋다. 신발을 신고 패딩을 입은 다음에 현관문을 연다. 아무래도, 나갔다 오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집 앞에는 조금 작은 하천이 있다. 길이 - 폭은 상류가 7m, 하류가 11m 정도 되는 듯 하다 - 가 약 5km정도 되는 하천인데, 중간중간에 다리가 있다. 징검다리도, 교각도 있다. 조금 어렸을 적에. 스물 두살 즈음에는 징검다리를 좋아했다. 요새는 교각이 더 편하다. 보폭을 짧게 해도, 길게 해도 물에 빠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상하게 만든 규칙 비스무리 한 것을 지켜야 하나 싶기 때문이다. 오늘은 정말 간만에 징검다리로 가 보기로 했다.




 징검다리에 사용된 돌은 크고 평평하다. 밟을 때의 느낌이 교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성큼 성큼 걸었다. 어쩐지 생각보다 괜찮다. 그렇게 걷다가 앞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다리가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다 온 상태에서 되돌아 가기에는 좀 그렇기도 하다. 별 수 없이 무리하게 다리를 벌려 건넜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봤다. 저 쪽에서 작은 아이들이 징검다리를 보고 좋아하며 건너려 든다. 내 일이 아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좀처럼 발을 뗄 수가 없다. 저 애들은 분명히 끝까지 올 수 없다. 다리가 짧기도 하지만, 쓸려갈 것 같다는 무서움 때문이겠지. 내가 저 나이때 겁쟁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갔겠지? 저 아이들이 다 건너길 기다린다. 그러자 빗방울이 툭 하고 떨어진다. 아까 전에는 맑았었는데 어느 새에 비가 오는 거지. 소나기겠거니 하며 휴대전화에 서울 날씨를 검색한다. 예보에도 나와있지 않은 소나기다.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당황하며 허둥댄다. 나 또한 그렇다.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결국 어떤 상가의 간판 밑에서 비를 피한다. 아는 사람이라곤 지나가지 않는걸까. 구원자 비슷한 그런 사람, 없으려나.




 머리 위로 동그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 용선이다. 어떻게 알아차린거지? 눈을 크게 뜨고 용선을 바라봤다. 용선은 그저 웃으며 이제, 가자. 라며 나를 이끈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우산이다. 나는 용선에게 붙었고 용선은 나의 어깨를 쥐었다. 용선의 손등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나의 한 팔을 적신다. 이미 한 사람의 몸을 거친 비는 뜨듯미지근하다. 고개를 살짝 올리니 용선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벨리아, 아벨리아, 아벨리아 같은 사람이다.




 비 내릴 날씨는 아님에 분명하다. 난 패딩을 입고 있고 용선 또한 패딩을 입고있다. 눈이 내려야 할 마당에 비가 온다. 분명히 좀 잘못 됐다. 잠깐 우산 밖으로 고개를 뺀다. 용선은 그런 나를 의아하게 쳐다본다. 하늘을 보자 분명히 파아란 하늘이다. 비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위에 구름이 따라오지 않는 이상 이러기도 힘들다. 다시 우산 속으로 들어가서 용선에게 달라붙는다. 체온이 느껴진다. 우리는 길의 끝을 걷는다. 남의 집 담과 우리가 걷는 거리 사이에 눈이 쌓여있다. 이내 비에 녹는다.




 다시 길을 걷는다. 유감스럽게도 집에 들어가지 못한 개미가 보인다. 비를 맞을테고 배가 고플테며 추위에 떨다가 죽을 것이다. 그런 삶도 아닌 삶을 살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여주는게 나을테지. 용선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작고 작은 개미를 발로 꾹 밟았다. 개미의 몸에서 터져나온 진액이 바닥과 개미를 끈끈히 붙여놓는다. 순간 몸에 전해오는 소름. 무언가를 죽였을 때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아직 사람이기는 한가보다.




 초여름 밤에, 나는 비를 맞았다. 그 때도 용선이 우산을 씌워줬다. 그 때 일이 문득 생각나서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용선에게 그 때의 일을 말한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냐는 듯 내게 묻는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이라는걸 용선은 알고 있을까? 용선이 알고 있다면 아마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테지만, 알고 있을리 만무하겠지. 용선은 그 때도, 지금도 아름답다. 초여름, 있을 리 없는 아벨리아가 내 눈 앞에서 핀 광경은 짜릿했다. 흔들거리던 그 머리카락은 예쁘다.




 나는 여성에게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교과서에서는 남녀간의 정이라던가, 여남간의 정이라던가 하는 그것들을 가르쳤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항의라도 할 것을 그랬다. 오늘날 후회를 하게 된다. 어느 새 나의 집 앞이다. 용선이 우산을 털고 나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혼자 둘 생각인건가? 나는 무표정으로 대응했다. 용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낸다. 역시 바보에게는 말로 해야 하는 건가 싶다. 




"같이 언니 집 가고싶은걸."




 용선은 그걸 말하는것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냐며 나에게 쓴소리를 한다. 그래봐야 투정이 섞인 소리다. 굳이 무섭지는 않다. 다시 용선의 옆에 꼭 붙어 용선의 집으로 간다. 그리 멀지 않은 - 같은 아파트 단지, 다른 동 - 곳에 있는 용선의 집은 어쩐지 잡동사니로 가득한 나의 집보다 넒어보인다. 샤워를 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간다. 오늘은 기분이 좋다. 하지만 남의 집에서 오래 씻는건 예의가 아니므로 최대한 빨리 나왔다. 하이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턴다. 짧은 갈색 머리에서 나온 생각들이 수건에 묻을 것 같다. 용선은 커피를 끓여 내어왔다. 내가 쓴 것을 잘 못 먹는걸 아는 용선이 어쩐지 블랙을 가져왔다.




 모처럼 용선의 집에서, 용선이 끓인 커피를 마신다. 집의 온기, 샤워 직후의 상쾌한 온기, 커피의 향긋한 온기로 무장해제 당해서 긴장이 풀린다. 내가 말 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생각만 하다가 말 하지 못하는걸 용선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말 하면 안 되는 감정이다. 용선은 집요하게 캐묻는다.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조마조마, 조마, 조마. 마음을 들켜나간다. 용선은 그럴 수록 더 깊게 알고싶어 한다. 안 돼, 더는 말 할 수 없다.




 지금 와서는 너무 이르다. 어쩌면 너무 늦었다. 아벨리아가 눈 앞에서 흔들린다. 꽃을 꺾고싶다. 꺾어버리면, 꺾어버리면 용선은 웃을 수 없다. 그저, 그저, 그저, 그저 나의 꽃을 뜯는다. 자학이라고 해도 좋고, 자해라고 해도 좋으며, 마조히즘(masochism)적인 취미라고 해도 좋다. 어차피 나는 웃어봤자 아름답지 않다. 거짓말이라도 행복하다면 된거다. 가상의 남자를 좋아하는 것 처럼 용선을 속이는거다. 거짓말로 나를 보호한다. 조화(造花)로 상처를 여매인다.




 용선은 거짓을 들을 때마다 나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멀어지는 것이 덜 아프다. 어쩌면 더 아프겠지.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그것을 놓아버리는 일이니까. 후회도 오래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한 번에 강한 아픔을 받을 자신이 없다. 겁쟁이는 어쩔 수 없다. 조화로 나를 꾸며대며 화려한 거짓말을 하니, 용선은 달칵달칵, 달칵, 달칵. 나에게서 멀리 걸어간다.




 거짓말을 많이 하면 말이 떨린다. 아까 전에 편지를 쓸 때도, 손이 떨렸다. 무언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려나. 서걱서걱, 한 자 한 자 적어가려고 노력했는데 별로 쓸 말이 없어서 난감했던 그 때가 기억난다. 갑자기 말을 할 수 없었다. 용선이 신나게 떠들다가 말수가 없어지고 표정도 멍해진 나를 보고는 '무슨 일이 있니' 라며 살갑게 물었다. 역시, 저런 아름다운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벌이 내려지는 것이 분명하다. 찻잔을 꼬옥 쥐었다.




 어느 날 아침이라는 말은 시덥지 않다. 나는 어제, 커피 한 잔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기절잠이 들고 말았다. 커피에 수면제라도 넣어 둔 것인지, 마시자마자 나른해졌다. 혹시 블랙은 수면제 성분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시덥잖은 상상도 해본다. 아직 촉촉한 눈을 비비고는 마루로 나간다. 용선이 아침을 차리고 있다.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 날이라 다행스러웠다. 기름을 살짝 두른 달걀말이와 따뜻한 밥을 차려서 식탁 위에 놓았다.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는데, 용선은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날 깨우러 그의 방으로 눈길을 돌리자 내가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듯 눈을 휘둥그레 떴기 때문이다.




"...밥 먹어."


"잘 잤어?"


"응. 너도?"


"응. 나도."




 잘 먹겠습니다. 그러고는 밥을 빤히 보다가 물컵을 잡아 물을 마신다. 밥을 먹기 전에 늘 물을 마시는 습관이 있다. 그것이 목을 축축히 적셔준다. 젓가락을 들어 밥을 집고 입으로 넣는다. 반찬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싫어하지 않는 반찬이 올라왔음에도 왜인지 밥만 먹는다. 정신없이 씹었다. 달다. 탄수화물 덩어리다. 용선을 보고 씹는 것이 멈춰진다. 무의식에서 한 마디가 튀어나온다.




"예뻐."




 용선이 들은건지 못 들은건지는 모르겠다. 조금 흠칫 하기는 했지만,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었기에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나 또한 실수임을 깨닫고 계속 밥을 먹는다. 적막한 식사시간이다. 서로에게 관심은 있다. 하지만 이도 저도 못 한채로 관심 없는 체를 해야겠지. 달칵거리는 사기 소리만이 난다. 적막을 깨고 싶어 헛기침이라도 했건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우음,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굳이 깨야 할 필요는 없다.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어차피 엄마와 아빠는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던가, 그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겁 내는건 엄마 아빠의 그런 시선이 아니라 좋아하는 용선이 나를 바라볼 경멸적인 시선이다. 그 시선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없다. 그래 뭐, 어차피 혼자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언제나 말 할 수 없어서 이리저리 헤메인다. 내가 그렇다. 이건 어휘가 모자라서 그런게 아니라는 것 쯤은 금세 알 수 있다.




 밥을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았다. 용선이 밥을 다 먹기까지 식탁에 앉아서 기다린 후에 용선이 그릇을 가져다 놓으니 설거지를 한다. 어쩌면 이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와 물소리가 함께 섞여 화이트 노이즈를 만들어낸다. 반사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모데라토, 모데라토. 용선이 가까이 와서 내 허리를 껴안는다. 허리에 이물질이 들어오는 느낌에 흠칫 했지만 용선은 괜찮다. 템포를 맞춰서 몸을 까딱거린다. 용선도 함께 흔들린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몸을 스친다.




 분명 가까운 장래, 나는 이런 일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당신은 사람을 미워할 것이다. 아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조차 읽지 못한 당신은 자괴 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 주지 않았던 나를 싫어하게 된다.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는 것도 힘들다. 너무 무리해서 멀어지려고 한건가, 싶기도 하다. 오늘은 이쯤 하고 용선과 잠시 떨어져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용선이 나를 내보내 주지 않는다. 가겠다는 말만 하면 금세 화제를 돌려버린다. 왜 나를 보내지 않는걸까 싶다. 아마 내가 멀어지려는걸 눈치 챈 건가? 아니면, 만약에 나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라면... 그것보다 좀 더 희박하게, 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더 적은 확률로, 나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면 어떤 기분일까. 망상은 약이다. 때때로 진통제처럼 복용한다. 그렇게 망상만 하다가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망상 속의 나는 전능하기에.




 나는 사람임을 잃어간다. 그저 나의 아픔만을 최우선으로 두고 용선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악마이며 이기주의자이다. 혹자는 나를 대(大)로 보는 공리(功利)주의자 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해봤자 울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화장실에 가겠다 하고 들어가 울었다. 소리를 죽인다. 소리를 죽인다... 입을 다물고 끄윽거린다. 소리를 내 봤자 용선은 나를 안으려 들 것이다. 더 이상 그런 것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문제다. 어떻게 알았는지 용선은 화장실 문을 세게 두드린다. 잠궈 두길 잘 했다. 이 참에 큰 소리로 울었다. 그리고 나가지 않는다. 용선은 분명 제 풀에 꺾여 잠들겠지. 그리고 다음날에 웃으면서 굿 모닝, 이라며 인사한다. 모두 없던 일처럼.




 언젠가는 삐걱거리는 이 관계도 끝난다. 그 때서야 혼자임을 알아버리는 것이다. 안 되는 사람은 무얼 해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삐걱삐걱, 삐걱, 삐걱. 용선이 두드리는 힘이 빠진 것 같다. 긁는 느낌이다. 나는 울음을 그쳤지만 눈시울이 뜨듯하다. 우리는 혼자다. 나는 문을 열지 않는다. 용선은 문을 열 수 없다. 내 거짓말이 큰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조금 좋지 않다.




 문득 떠오른다. 열지 않으면, 계속 열지 않으면 용선은 어디까지 노력할까? 망치로 문을 부술까? 톱으로 문을 자를까? 핀을 벌려 열쇠를 열까. 나는 그가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하지만 이내 지친 듯이 우는 소리에도 힘이 빠짐을 느낀다. 그리고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갑작스레 불안함이 닥친다. 하지만 이제 와서 열 수도 없다. 조마조마, 조마, 조마한 얼굴로 문을 본다. 용선이 지쳐있을 광경이 눈에 선하다. 절대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지친 체 할 수 없다. 문을 열기 무섭다. 나는 색색거리며 잠든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당신은 색색 거리면서 자고 있다. 마치 노력하는 매미의 모습같아서 안쓰럽다. 와중에도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평안하게 자고 있지 않다. 용선은 맴맴, 맴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나는 용선에게 별로 좋지 않은 짓을 해 버린 것이다. 긴장한 탓에 차가워진 손으로 용선의 뺨을 쓰다듬는다. 어쩐지 오늘따라 손이 거칠다. 괜히 울컥한다. 울기 전에 용선의 집을 나오고 싶다. 손이 덜덜 떨린다. 깰까 하여 조심스레 손을 올리고는 일어난다. 어느 새, 아침이 끝나간다.




 이건 분명 내가 이상한 것이겠지. 연정을 품어도 안 되는 사람에게 연정을 품었다. 신이 벌을 내린 것임에 틀림 없다. 아벨리아 앞에서 향기에 취했다. 옥상으로 올라간다. 사실 떨어질 생각은 없다. 떨어져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나. 내가 원하는 벌은 조금 더 고통스러운 벌이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옥상에서 외친다. 하지 못했던 말을 전부 내뱉는다. 이건 내가 이상한 탓에, 뱉지도 받지도 못한 말들. 연심을 전하는 말들이다. 어휘는 넘쳐난다. 입 안에서 맴돌 뿐이다. 최고의 말을 전할 수 없는 나는 멍청한 것임에 짝이 없다.




"좋아해."


"너는 아름다워."


"그냥 말해줘, 좋아한다고."


"특별히 다른건 바라지 않는걸."


"사랑해, 사랑하고 있으니까."


"제발 웃어줘."


"나 때문에 우는 일은 없었으면 해."




 한 바탕 쏟아붓고 나니 조금 속편하다. 진작에 이러면 됐을 것을. 나는 이상한 사람이다. 사실, 사고 회로부터 글러먹긴 했다. 사람이 꽃이 될 수 없고, 상처 난 부위를 조화로 메꿀 수 없듯이 말이다. 겨울의 찬바람이 두 뺨을 시리게 한다. 아벨리아의 향이 아직도 손에 남아있다. 눈을 비볐다. 눈물이 언 느낌이 든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두고 온 편지가 생각난다. 아직 집에 남아있겠지. 마저 써야 하는데 무슨 말을 쓸까 생각한다.




 방금 뱉은 말을 쓸까, 하다가 조금 더 예쁜 말을 쓰기로 한다. 손발이 남아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할 수 있으면 된다. 전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다. 하지만 발신할 수 없는 편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할 수 있을 말을 고민하면서 전하지 않는다. 편지가 도착할 곳은 없다. 아마 평생 가지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야 보면서 후회하겠지. 어쩌면 존재 자체를 잊을 수도 있겠다. 차라리 그렇다면 고통이라도 덜하련만.




 나는 꿈이 있다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그중에서 제일 간단한 것은 돈과 시간이다. 돈이야 벌면 되고, 시간은 기다리면 된다. 나의 꿈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용기는 솟아나지 않고 생기지 않는다. 기다리면 줄고 벌 수 없다. 이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일찌감치 포기한 이유도 이것 뿐이다. 한심하고 한심한 이유였을 뿐이다.




 옥상에서 반나절을 지낸 것 같다. 세 시간 동안이나 해야 할 만큼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귀는 얼어서 새빨갛다. 만지면 깨질 것 같으니, 후드를 뒤집어 쓰고 싶다. 이제 집에 갈까, 하고 내려간다. 계단을 한 칸, 두 칸을 내려간다. 발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어쩐지 내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이 발소리가 더해져서 들린다. 같은 곳 주민이겠거니... 알아봐주시면 사진이나 함께 찍을 목적으로 머리를 뒤로 넘긴다. 그러면서도 내려간다. 마주친 사람은, 어쩌면 이미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만 아니기를 바라고 싶었던 - 사실은 이미 그이기를 바랐던 - 용선이다. 나는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난다. 용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에게 다가온다.




 손에 들고 있는 낯설지 않은 종이. 그것은 분명히 내가 용선에게 쓴 편지임에 틀림없다. 이러면 안 되는데, 표정이 일그러진다. 난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는건데도 불구하고. 달게 받기로 마음먹었는데 생각외로 쉽지 않다. 나는 도망치듯이 뛴다. 위로, 위로. 하지만 얼마 못가 잡히겠지. 뒷덜미를 움켜잡힌 나는 놓으라며 발버둥친다. 하지만 용선은 놔주지 않는다. 벽으로 날 밀친다. 눈을 보기 싫다. 분명히 더러운 사람을 보는 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울기 싫은데, 아까보다 서럽다. 울고 있다. 할 말은 없다. 죄인이므로 할 말은 없다. 나는 목소리를 떨며 운다. 용선은 그런 나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지금 와서, 지금 와서 알아차리면 뭐 하자는 건데,"




 투정 부리고 있다.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고 있다. 실로 쓰레기임에 틀림 없지 않는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면서 날카롭게 이야기한다. 내가 상처 위에 붙였던건 조화가 아니라 칼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된거, 차라리,




"선택 해줘."




 착한 나, 휘인. 분명히 용선에게 피해를 입힐 일도 없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좀 더 깊은 우정의 유대를 이어나갈 착한 나, 휘인.




"아니면 나를 죽여줘."




 용선에게 있어서 착한 내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것 쯤을 내가 모를리 없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생각해주는 언니에게 연심이나 품고 있는 더러운 사람. 어쩌면 독충.




"어서, 여기서 밀어줘."




 나를 이 지옥에서 구해줘.




"정휘인!"




 나를 크게 부르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린다. 이미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그의 손으로 그는 닦는다. 날 보면서 웃어준다. 안심되는 웃음. 그 웃음을 보고싶었다. 엉엉 운다. 서러움과 조마조마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을 모두 털어버리는 울음이다. 나는 고장난 인형처럼 계속 울기만 할 뿐이다. 그런 나를 말 없이 어루만지고 안아주기만 한다. 용선은 그렇게 했다. 내 마음을 알아간다. 내 마음과 일치했다. 그의 마음을 알아간다. 조금 늦긴 했지만, 알아간다.




 지금 와서, 그저 나는 아벨리아의 향기에 취한다. 탁 놓아버린 울음을 지으며 아벨리아를 올려본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어찌나 고혹적인지. 지금은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너무나도 많은데,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문제이다. 아벨리아! 조화와 칼자국으로 얼룩진 내 몸을 감싸준다. 아픔이 싹 가신다. 받아야 할 벌이 모두 탕감된다. 모든 생각도 사고도 이제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저 말하고만 싶었다.




 당신은 나를 위로한다. 그것은 다시 매미소리로 변해서 매앰- 매앰- 하며 나를 지켜낸다. 나의 부정을 담아서 멀리 날아가라, 매미야. 당신은 그렇게 나를 세게 끌어안는다. 아벨리아의 품에 안겨서 나는 그 향에 취한다. 




 인제는 말을 한다기보다는 듣고싶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을 내 귀에 하나씩 박아넣고 싶다. 부디 한 마디씩 천천히, 향긋하게 속삭여주기를 바란다. 용선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대고 떨리는 말로 말한다. 사실, 대답에 가깝다.




"나도 좋아해, 휘인아."




 그렇게 아침이 끝나간다. 두 사람이 웃는다. 울음이 섞여 바보같은 얼굴이다. 나는 조금 더 진보하기로 한다. 용선의 두 볼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한다.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아벨리아의 숨소리. 눈을 살포시 감은 채로 두 붉음을 마주한다. 편지를 두 손으로 꼬옥 쥔다. 입 안에 담긴 말을 용선의 입으로 전달하듯이 섞는다. 편지가, 끝나간다.




*   *   *




포 11310자, 공미포 8113자.

용휜, 무길만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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